
아밀 작가의 두 번째 소설집 『멜론은 어쩌다』는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여덟 편의 단편집이다. SF어워드 중·단편 부문 우수상과 대상을 연이어 수상한 그는 이번 작품에서도 신화적 상상력과 젠더 감수성, 그리고 예리한 현실 인식을 결합해 한국 SF문학의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한다.
상상력으로 현실을 비트는 아밀의 세계
『멜론은 어쩌다』는 기존 SF문학의 틀을 벗어나, “현실과 한 발짝 옆으로 비켜선 세계”를 세밀하게 그려낸다. 아밀의 소설에는 인간의 감정, 욕망, 관계가 중심에 있으며 그 위에 비현실적인 장치들이 자연스럽게 얹혀 있다. 이성애자 인간과 레즈비언 뱀파이어의 복잡한 우정을 다룬 〈나의 레즈비언 뱀파이어 친구〉에서는 “다름을 인정하는 관계의 아름다움”이 드러난다. 〈어느 부치의 섹스 로봇 사용기〉에서는 첫사랑의 상처를 극복하기 위한 부치 여성의 독특한 일상이 펼쳐지며, 〈인형 눈알 붙이기〉에서는 별다른 야심 없이 살고 싶은 마녀가 위험한 의뢰에 휘말리며 겪는 사건을 통해 ‘평범한 욕망조차 통제되지 않는 세계’를 보여준다. 각 작품은 장르적 상상력 위에 인간의 내면을 세밀하게 포착하며, 독자는 매 단편마다 다른 세계의 문을 열게 된다.
신화적 상상력과 젠더 감수성의 결합
아밀의 글쓰기에는 ‘신화적 상상력’과 ‘젠더적 시선’이 공존한다. 그녀는 SF라는 장르를 단순히 기술이나 미래의 상징으로 쓰지 않고, 현실을 비추는 거울이자 해석의 도구로 사용한다. 〈나의 레즈비언 뱀파이어 친구〉에서 등장하는 뱀파이어는 이질적인 존재이자, 사회가 만들어낸 ‘타자’를 상징한다. 〈어느 부치의 섹스 로봇 사용기〉는 기술이 인간의 외로움을 대신할 수 있을까를 묻는 이야기로, 인공지능과 인간의 감정이 교차하는 새로운 형태의 관계를 보여준다. 이처럼 『멜론은 어쩌다』 속 여덟 편의 단편은 현실적인 문제 ― 젠더, 사랑, 자아, 욕망 ― 을 비현실적인 세계 속에 투사하며, 결국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으로 돌아온다. 박서련 작가가 말했듯, “갓 씻어낸 제철 과일처럼 신선한 상상력과, 곧 그 껍질을 저며낼 칼처럼 예리한 시선이 공존한다.”
유쾌하고 능청스러운 서사의 힘
『멜론은 어쩌다』의 또 다른 매력은 ‘서사 리듬’이다. 아밀은 무겁고 복잡한 주제를 다루면서도 경쾌하고 유머러스한 문장으로 이야기를 전개한다. 작품 속 인물들은 모두 엉뚱하고 기묘하지만, 동시에 현실적이다. 그들의 욕망, 외로움, 그리고 사랑은 우리가 사는 세계와 닮아 있다. 특히 그녀의 캐릭터들은 “세상의 틀 밖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마녀, 뱀파이어, 로봇, 인간 ― 이 모든 존재들은 사회의 기준으로 보면 ‘이상한 존재’이지만, 아밀은 그들의 세계를 통해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가 얼마나 얇은가를 보여준다. 그녀의 문장은 섬세하지만 단단하고, 때로는 농담처럼 가볍게 던진 문장이 독자의 가슴에 오래 남는다. 이 능청스러운 서사가 바로 아밀 문학의 가장 큰 매력이다.
『멜론은 어쩌다』는 단순한 SF소설집이 아니라, 현대 한국문학의 확장된 가능성을 보여주는 실험적인 작품이다. 아밀은 기술, 젠더, 인간성이라는 키워드를 중심으로 현실의 경계를 살짝 밀어내고, 그 사이에서 새로운 이야기를 창조한다. 그녀의 문장은 부드럽지만 단단하며, 상상력은 낯설지만 친숙하다. 결국 『멜론은 어쩌다』는 “마녀의 소설”이라 불릴 만큼, 자신만의 리듬과 언어로 세상을 해석하는 작가의 선언문이다. 2025년, 한국 SF문학의 다음 페이지는 바로 아밀의 손끝에서 열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