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하네 분짜』는 유영소 작가의 첫 장편소설로, 다문화 가정의 일상과 정체성, 그리고 세대 간의 갈등을 섬세하게 그려낸 작품입니다. 베트남에서 온 어머니와 한국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주인공 박하가 작은 베트남 음식점 '박하네 분짜'를 운영하면서 겪는 삶의 혼란과 성장, 그리고 관계의 회복 과정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음식이라는 구체적인 매개를 통해 언어, 기억, 문화가 연결되고 충돌하는 과정이 섬세하게 묘사되며, 정체성과 가족, 공동체에 대한 깊은 질문을 던집니다. 본 분석에서는 주요 인물, 이야기 구조, 문학적 장치 중심으로 『박하네 분짜』의 매력을 심층적으로 들여다보겠습니다.
인물 분석: 박하, 선영, 투기엔 – 문화의 경계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박하는 '낀 세대'입니다. 그는 베트남인 어머니와 한국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났지만, 어릴 적 아버지를 잃은 후 어머니와 단둘이 살아오며 뿌리의 불분명함을 늘 내면화하고 살아갑니다. 그는 외모로는 한국인과 다르지 않지만, 마음 깊은 곳에서는 자신을 완전한 한국인으로 보지 못합니다. 베트남어를 잘하지 못하고, 어머니의 문화가 부끄럽고, 가게를 하는 것에도 회의감을 품습니다. 그는 자신이 운영하는 ‘박하네 분짜’라는 가게조차 자신의 것이 아닌 듯 여깁니다. 그가 느끼는 단절감은 단지 모자 관계나 국가 정체성에 국한되지 않으며, 사회적 소속감과도 관련되어 있습니다. 선영은 박하의 어머니로, 남편을 잃고 혼자서 아들을 키우며 분짜 가게를 운영해 온 강인한 여성입니다. 그녀는 박하보다 한국어에 능숙하지 않고, 손님 응대도 서툴지만 음식 하나에는 누구보다 정성을 기울입니다. 그녀의 언어는 거칠지만, 삶의 태도는 정직하고 부지런합니다. 그녀는 고국을 떠나온 이방인이면서도, 음식과 노동을 통해 자기 존재를 증명해 내는 인물입니다. 특히 그녀는 자신을 한국화 하려 애쓰기보다는, 베트남식 삶의 방식을 지키려는 태도를 통해 박하와 갈등을 빚습니다. 그러나 그 갈등은 필연적이며, 모자의 상호 이해를 위한 긴 여정의 일부로 그려집니다. 튀엔은 박하가 우연히 만나게 되는 베트남 출신 이주노동자로, 초반에는 이름조차 낯선 인물입니다. 그는 사회적으로 더 약자의 위치에 있으며, 언어와 법적 지위의 불안정함 속에서 하루하루를 버텨나가는 인물입니다. 하지만 그는 박하보다도 자기 삶을 긍정하고,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받아들이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박하는 티엔을 통해 ‘정체성은 만들어가는 것’이라는 메시지를 깨닫게 되고, 어머니의 삶 역시 다시 바라보게 됩니다. 이들의 관계는 단순한 동정이나 감정적 유대 이상으로, 사회적 거리를 좁히는 ‘정서적 교류’의 실현입니다.
서사 구조: 반복되는 일상, 그 안의 변화와 회복
『박하네 분짜』는 뚜렷한 갈등 구조나 반전을 기대하는 이야기와는 다릅니다. 큰 사건보다는 사소한 일상이 반복되고, 그 속에서 인물의 감정과 관계가 서서히 변화하는 방식으로 전개됩니다. 이러한 반복형 서사는 독자에게도 인내를 요구하지만, 동시에 박하의 내면 변화에 몰입하게 만드는 힘을 가집니다. 가게 문을 열고, 야채를 다듬고, 분짜를 만들고, 손님을 맞이하는 일상은 단조롭게 보일 수 있지만, 그 안에서 박하와 어머니, 티엔의 감정선이 점점 변화합니다. 초반의 박하는 가게의 일을 귀찮아하고, 어머니의 음식 방식에 불만을 품지만, 이야기가 전개될수록 그는 조리법을 배우고, 직접 손님을 맞이하며 가게와 자신의 삶을 연결 짓기 시작합니다. 특히 인물 간의 갈등과 화해는 말보다는 ‘행동’과 ‘음식’을 통해 드러납니다. 어머니는 박하에게 직접 요리를 가르치지 않지만, 그의 손질법이나 반응에 따라 간접적으로 마음을 전합니다. 박하 역시 튀엔에게 처음에는 낯설고 멀게 대하지만, 음식 한 그릇을 건네는 순간부터 관계의 거리가 급속히 좁혀집니다. 이처럼 ‘말’ 대신 ‘행동’과 ‘음식’이 감정의 전달 매체로 기능하며, 서사는 침묵 속에서 진행됩니다. 이야기의 후반부에서 박하가 자발적으로 분짜를 요리하고, 어머니의 레시피를 따라 하며 음식의 의미를 곱씹는 장면은 그가 스스로의 정체성을 수용하고 가족과의 연결을 복원하려는 상징적인 장면입니다. 이는 단순한 성장서사가 아니라, ‘문화적 화해’와 ‘개인 내면의 수용’을 의미합니다.
문학적 장치와 음식의 은유: 냄새, 질감, 그리고 마음
음식은 이 소설에서 단순한 배경이 아닙니다. 작가는 ‘분짜’라는 구체적인 베트남 요리를 중심으로 문화의 교차와 감정의 결절을 구현합니다. 분짜의 향, 식감, 조리법 하나하나가 이야기의 정서와 연결되며, 그것은 말보다 더 많은 것을 전합니다.
박하는 처음에 분짜의 향이 익숙하지 않고 부담스럽다고 느낍니다. 이는 어머니의 문화, 즉 베트남적 정체성에 대한 거부감을 반영합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며 그는 분짜의 냄새와 맛에 익숙해지고, 직접 요리하게 되면서 이질감은 공감으로 전환됩니다. 결국 분짜는 ‘차이’가 아니라 ‘연결’의 매개로 기능하며, 음식은 정체성의 은유로 완전히 전환됩니다. 문장의 구성 역시 절제된 감정을 담고 있습니다. 유영소는 불필요한 묘사를 배제하고, 일상어에 가까운 문장을 통해 인물의 감정을 직설적이지 않게 전달합니다. 특히 선영의 말투, 박하의 시선 묘사, 튀엔과의 짧은 대화들은 감정의 파동을 낱낱이 드러내기보다는, 침묵과 여백을 남기는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공간 또한 인물의 감정과 직결됩니다. 가게는 작고 낡았으며, 외부와 단절된 듯한 구조를 갖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폐쇄적인 공간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교류는 ‘닫힘 속의 개방’을 상징합니다. 외부 세계에서 인정받지 못한 사람들이 이 안에서 서로를 이해하고, 삶을 이어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