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지영 작가의 『블랙박스』는 한 교실에서 벌어진 사건을 중심으로, 청소년들의 감정 억압과 집단 내 긴장을 날카롭게 포착한 문제작이다. 감시와 침묵, 기억과 진실 사이에서 고민하는 인물들의 심리를 섬세하게 그려내며, 학교라는 공간 안에서 10대들이 겪는 불안과 내면의 갈등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단순한 미스터리를 넘어, 청소년기의 감정 구조와 사회적 억압을 동시에 사유하게 만드는 작품이다.
감정이 통제된 교실, 블랙박스가 기록한 것
『블랙박스』의 배경은 평범한 중학교 2학년 교실이다. 하지만 이 교실은 평범하지 않다. 책상, 복도, 교탁, 심지어 복도 구석까지도 ‘블랙박스’로 감시되고 있는 공간이다. 사건은 이 감시 카메라가 설치된 날 시작된다. 한 학생이 학교에서 다치는 사고가 발생하고, 교실 안의 모든 시선은 누구에게 책임이 있는지를 추궁하는 방향으로 흘러간다. 이 과정에서 등장인물들의 감정은 억눌린 채 교묘히 표면 아래 숨는다. 친구를 의심하면서도 겉으로는 웃고, 불안을 느끼면서도 평온한 척하는 모습들. 황지영 작가는 이러한 교실 풍경을 극도로 사실적으로 그려내며, 청소년들이 처한 ‘감정 통제 사회’의 축소판으로서의 교실을 설득력 있게 보여준다. 가장 큰 아이러니는 ‘모든 걸 기록한다’는 블랙박스가 정작 중요한 감정은 담아내지 못한다는 점이다. 영상에는 말과 행동이 찍히지만, 그 안에 담긴 분노, 공포, 불안은 기록되지 않는다. 이 작품은 그 간극에서 발생하는 진실과 왜곡의 문제를 예리하게 짚어낸다. 감정을 말하지 못하게 하는 분위기, 감정을 말하면 이상하게 여겨지는 사회 속에서 청소년들이 어떤 선택을 하게 되는지를 보여주는 장면들은 매우 인상 깊다.
말하지 못하는 10대, 불안을 삼키는 일상
작품의 주인공 ‘지유’는 내성적이고 관찰적인 아이이다. 교실에서 발생한 사건의 중심에는 없지만, 모든 상황을 묵묵히 지켜보며 기록하는 역할을 한다. 작가는 지유의 시선을 통해 사건의 진실보다 더 중요한 ‘분위기’와 ‘기류’를 묘사한다. 이 교실에서는 말하는 사람이 손해를 보고, 침묵이 미덕처럼 여겨진다. 감정 표현은 약함으로 간주되고, 불편한 감정은 모두 속으로 삼켜야 한다. 지유는 자신의 불안, 의심, 두려움을 블랙박스처럼 마음속에 차곡차곡 저장해 둔다. 실제 블랙박스는 자동차의 사고를 기록하지만, 지유는 자신의 감정 사고를 조용히 담아내고 있는 셈이다. 황지영 작가는 이 인물의 내면을 통해 ‘말하지 못한 감정이 어떻게 무기처럼 돌아오는지’를 보여준다. 이 소설이 특별한 점은, 사건의 진실 여부보다 그 사건을 둘러싼 인간 심리와 감정의 무게에 집중한다는 것이다. 누구의 잘못이었는가를 밝히는 대신, 모두가 조금씩 침묵에 가담하고 감정을 억누른 결과 어떤 결과가 생겼는지를 묻는다. 지유가 끝내하지 못한 한 마디의 말, 누군가에게 전하지 못한 감정이 독자에게 오래 남는 이유다.
감정을 억누르는 사회, 그 안의 성장
『블랙박스』는 청소년기의 성장 서사를 감정 억압과 사회적 분위기라는 테마와 연결해 풀어낸다. 교실은 작은 사회이며, 그 안에서 학생들은 어른들이 강요하는 침묵과 모범성에 익숙해진다. 하지만 작가는 말한다. “감정은 없앨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이해해야 할 것”이라고. 이 작품에서 인물들이 성장하는 방식은 정면 돌파가 아니다. 지유는 결국 큰 목소리를 내지는 않지만, 마음속에서 ‘그 말을 하지 못한 자신’을 인정하는 데까지 도달한다. 작가는 그런 변화조차도 의미 있는 성장으로 본다. 특히 엔딩에서 지유가 블랙박스 영상을 다시 보며 자신의 기억과 감정이 영상과 어떻게 달랐는지를 비교하는 장면은 이 작품의 핵심 메시지를 담고 있다. “기억은 사실이 아니더라도, 감정은 언제나 진실”이라는 것이다. 이처럼 『블랙박스』는 교실을 배경으로 하지만, 실은 청소년기의 감정 구조와 사회적 억압 속 개인의 변화를 정밀하게 포착한 작품이다. 학교폭력, 감시, 집단 동조 등 여러 키워드를 품고 있으면서도 중심은 ‘감정’에 있다. 감정을 표현하지 못하는 사회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묻는 이 작품은 청소년 독자뿐 아니라 모든 세대가 함께 읽어야 할 문제작이다. 황지영 작가의 『블랙박스』는 학교라는 공간을 통해 10대의 억눌린 감정과 침묵의 무게를 날카롭게 기록한 성장소설이다. 감시가 일상이 된 시대, 감정을 말하지 못하는 청소년들의 세계를 통해 우리는 중요한 질문을 마주하게 된다. “기록되지 않은 감정은 존재하지 않는 것인가” 이 책은 그 질문에 감정으로 답한다. 보이지 않지만 존재하는 것, 그것이 진짜 진실이라는 메시지를 담아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