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서해 작가의 『여름은 고작 계절』은 여름이라는 한정된 시간 속에서 인간의 감정이 어떻게 피고 지는지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이번 글에서는 주인공의 시점으로, 사랑의 상실과 감정의 회복, 그리고 시간의 흐름 속에서 자신을 다시 발견하는 과정을 따라가 본다. 여름은 단지 더운 계절이 아니라, 그 안에서 인간이 어떻게 무너지고 다시 살아나는지를 보여주는 정서적 무대다.
여름의 시작, 남겨진 온도
햇빛은 매일 같은 각도로 내 방을 비췄다. 바닥에 떨어진 빛은 흘러내리지도, 사라지지도 않았다. 그 안에서 나는 시간을 잃었다. 그는 떠났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세상은 여전히 돌아갔지만, 나만 여름의 한복판에 멈춰 있었다. 유리창 너머로 매미 소리가 들릴 때마다 심장이 바짝 말랐다. 그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곧 돌아올게”였다. 나는 그 말을 붙잡고 하루를 버텼다. 하지만 하루가 일주일이 되고, 한 달이 지나자, 그 약속은 점점 색을 잃어갔다. 그가 남긴 컵에는 여전히 그의 입술 자국이 남아 있었고, 나는 그 흔적을 지우지 못했다. 매일 같은 시각에 그가 앉던 자리를 바라보며, 여름이 끝나지 않기를 바랐다. 여름이 끝나면 그마저 사라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나는 여름을 증오했지만, 여름이 없으면 나는 그를 기억할 수 없었다. 바람의 냄새, 햇살의 뜨거움, 냉수의 차가움까지. 모든 것이 그를 데려왔고, 그리움은 매일 같은 시간에 찾아와 내 가슴을 쥐어짰다. 그렇게 나는 여름에 갇혀 있었다.
기억의 잔열, 다시 나를 마주하다
어느 날 오후, 하늘이 잠시 흐려졌을 때 나는 비를 기다렸다. 그는 비를 좋아했다. 비가 오면 그는 항상 창가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말했다. “이 냄새 좋지 않아?” 그때는 몰랐다. 그 말이 마지막이 될 줄은. 비가 내리자 나는 거리로 나갔다. 젖은 흙 냄새가 코끝을 스쳤고, 바람은 내 머리카락을 흩날렸다. 그 순간, 이상하게도 울음이 터지지 않았다. 대신 숨이 깊어졌다. 오랜 시간 눌러왔던 감정이 천천히 녹아내렸다. 나는 처음으로 ‘그가 없는 나’를 마주했다. 나는 그가 남긴 공간들을 하나씩 정리했다. 서랍 속 사진, 침대 맡 책, 그가 사준 컵. 처음엔 버리지 못했지만, 어느 날 그것들이 내게 말을 걸었다. “이제 괜찮아.” 나는 조용히 웃었다. 그가 떠난 자리에 생긴 빈 공간은 공허가 아니라, 다시 나를 채우는 여백이었다. 여름의 뜨거움은 상처를 덮었고, 비는 남은 그리움을 씻어냈다. 그렇게 나는 조금씩 다시 숨을 쉬었다.
여름의 끝, 그리고 나의 문장
8월의 마지막 날, 바람이 달라졌다. 매미 소리는 점점 줄었고, 나무 그림자는 길어졌다. 나는 그가 떠난 길을 걸었다. 발밑의 흙이 바스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예전 같았으면 그 소리마저 아팠겠지만, 오늘은 이상하게 따뜻했다. 나는 문득 생각했다. 여름은 정말 고작 계절일까? 그 안에서 나는 사랑했고, 무너졌고, 다시 일어섰다. 만약 그가 돌아온다 해도, 나는 예전의 내가 아닐 것이다. 이제는 그를 붙잡지 않아도 괜찮았다. 밤이 되자 창문을 열었다. 바람이 커튼을 흔들며 방 안으로 들어왔다. 나는 오래된 노트를 꺼내 한 줄을 적었다. “여름은 고작 계절이지만, 그 안에서 나는 한 번 더 살아냈다.” 그 문장을 쓰는 순간, 여름의 끝이 느껴졌다. 그러나 그 끝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었다. 나는 여름을 떠나보내며, 나 자신에게 돌아왔다. 그의 부재는 내 인생의 공백이 아니라, 나를 완성하는 한 조각이었다. 여름은 그렇게 나를 무너뜨리고, 다시 일으켜 세웠다. 나는 여름을 증오하면서도 사랑했다. 그리고 이제야 안다. 여름은 고작 계절이 아니다. 그것은 나의 감정이 지나간 시간, 그리고 다시 살아난 증거였다.『여름은 고작 계절』은 한 사람의 감정이 계절을 통과하며 변하는 과정을 통해 인간의 내면을 탐구하는 이야기다. 주인공의 시선으로 본 여름은 단순히 뜨거운 시간이 아니라, 상실을 받아들이고 자신을 회복하는 치유의 과정이다. 여름은 사라지지만, 그 안에서 피어난 감정의 흔적은 남는다. 김서해 작가는 이 작품을 통해 우리에게 말한다. “모든 감정은 지나가지만, 그 흔적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