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허주은 작가의 『잃어버린 이름들의 낙원』은 단순한 역사소설이 아니다. 이 작품은 19세기 조선을 배경으로, 연쇄살인사건의 진실을 쫓는 여성 다모 ‘설’의 이야기를 통해 억압된 시대 속에서도 진실을 향한 인간의 의지와 정의의 가능성을 탐구한다. 허주은은 역사적 사실과 추리적 서사를 정교하게 엮어, 사라진 이름과 잊힌 목소리들을 복원한다. 그 속에서 작가는 여성이라는 존재가 어떻게 기록되지 못한 역사의 뒤편에서 싸워왔는지를 섬세하게 드러낸다.
19세기 조선, 이름을 잃은 자들의 이야기
소설은 살인사건으로 시작되지만, 중심에는 범죄보다 더 깊은 사회적 비극이 있다. 19세기 조선은 신분제의 그림자와 부패한 권력이 뒤엉킨 사회였다. ‘설’은 관청의 하급직 다모로, 여성이라는 이유로 이름조차 기록되지 못한 존재였다. 그녀가 맡은 사건은 단순한 살인이 아니라, 권력층이 감춘 진실을 파헤치는 여정이다. 허주은은 당대의 역사적 맥락을 섬세히 고증하며, 현실적 제약 속에서도 정의를 향해 나아가는 ‘설’의 내면을 사실적으로 그려낸다. ‘이름을 잃은 자들’이라는 표현은 단지 익명의 피해자들만을 뜻하지 않는다. 그것은 당시 조선의 수많은 여성, 하층민, 기록되지 않은 사람들의 또 다른 이름이다. 작가는 이 소설을 통해 “기록되지 않은 이들도 역사를 만든다”는 강한 메시지를 남긴다. 『잃어버린 이름들의 낙원』은 그들의 잃어버린 흔적을 문학으로 되살려낸다.
다모 ‘설’ — 억압 속에서도 진실을 쫓는 여성의 초상
주인공 설은 강단 있고 영민하지만, 제도와 신분의 벽 앞에서는 늘 한계를 마주한다. 그녀의 추적은 단순한 범인 색출이 아니라, “진실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으로 확장된다. 허주은은 설의 시선을 통해 당시 여성들이 겪었던 이중적 억압을 정면으로 드러낸다. 그녀는 남성 중심 사회 속에서 증거를 찾아야 하고, 권력층이 감춘 비밀과 맞서야 한다. 설이 사건을 좇으며 발견하는 것은 단지 살인자의 정체가 아니라, 진실을 말할 수 없었던 사람들의 목소리다. 이 과정에서 ‘설’은 다모라는 직업적 정체성을 넘어, 인간으로서의 주체성을 회복한다. 그녀의 여정은 곧 “이름을 되찾는 과정”이다. 허주은은 설의 감정선과 시대적 배경을 교차시키며, 긴장감과 서정성을 동시에 유지한다. 읽는 내내 느껴지는 건 추리소설의 쾌감이 아니라, 역사를 다시 쓰는 문학의 울림이다.
역사와 미스터리의 완벽한 결합 — 허주은의 문학적 실험
『잃어버린 이름들의 낙원』이 돋보이는 이유는 역사소설의 무게와 미스터리의 속도를 절묘하게 결합했다는 점이다. 허주은은 사건의 퍼즐을 맞춰가는 과정에서 인물의 감정과 사회의 구조를 동시에 탐구한다. 단서 하나하나가 단순한 추리의 재료가 아니라, 그 시대의 ‘진실을 말하지 못한 역사’를 상징한다. 특히 작가는 “이름을 잃는다는 것은 곧 존재를 지우는 일”이라는 주제를 중심에 놓고, 사건의 결말보다 ‘기억의 회복’을 더 중요하게 그린다. 결국 이 소설은 살인의 미스터리를 넘어, ‘기억과 정의’에 대한 문학적 사유로 완성된다. 마지막 장면에서 설이 마주한 낙원은 실제의 공간이 아니라, 진실을 마주한 내면의 평화다. 그 장면은 독자에게 묻는다. “당신은 이름을 잃은 누군가의 이야기를 기억하고 있는가?” 허주은은 그 질문을 통해, 독자 스스로 잊힌 존재들을 다시 부르는 행위를 문학으로 제안한다.
『잃어버린 이름들의 낙원』은 역사적 사실과 미스터리의 서사를 통해 인간의 존엄을 탐구하는 작품이다. 허주은은 여성 다모 ‘설’을 통해 진실을 향한 용기, 기록되지 못한 이름의 의미를 섬세하게 그려낸다. 이 소설은 단순한 시대극이 아니라, ‘기억과 정의의 복원’을 향한 문학적 선언이다. 읽고 나면 남는 건 사건의 충격이 아니라, 진실을 향해 걸어간 한 인간의 발자취이다. 19세기 조선의 어둠 속에서, 설의 발걸음은 여전히 현재를 향해 울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