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윤옥, 정년을 눈앞에 두고 있는 중등 국어 교사. 하지만 그녀의 삶은 흔히 생각하는 ‘안정된 교사’의 경로와는 전혀 다르다. 교사로서의 사명과 현실의 충돌, 사회의 편견 속에서 지켜야 할 동생과 무너진 직장, 그리고 짧게 운영된 풀뿌리 책방까지. 그녀는 평범한 여성으로 태어났지만, 매 순간 비범한 선택을 해야 했다. 이 글은 정윤옥이라는 한 개인의 이야기를 통해 한국 사회에서 ‘중년 여성’이 어떤 생존 전략을 강요받는지, 그리고 그 속에서도 어떻게 ‘자신의 세계’를 지켜낼 수 있는지를 진지하게 탐구한다.
교사로 살아낸 세월, 그리고 파면이라는 낙인
정윤옥은 20대 초반, 사범대학에 진학하면서 ‘좋은 교사’가 되고 싶었다. 아이들의 가능성을 키워주는 사람이 되고 싶었고, 고단한 현실을 책과 언어로 이겨내게 도와주는 존재가 되고 싶었다. 하지만 막상 교직에 들어선 현실은 그녀의 이상을 하나하나 무너뜨렸다. 교직 3년 차, 정윤옥은 교원의 권익과 교육의 공공성을 주장하며 교원노조에 가입했다. 당시만 해도, 노조 활동은 암묵적으로 금기시되었고, 교육청과 학교 측은 그녀의 선택을 ‘반항’으로 받아들였다. 결국 그녀는 파면되었다. 사직이 아닌 ‘파면’이라는 단어는 그녀의 이력서를 가로막았고, 지역사회에서의 이미지마저 훼손시켰다. 동료들은 외면했고, 일부는 노골적인 적대감을 드러냈다. “괜히 나섰다가 인생 망쳤다”는 말이 그녀를 따라다녔다. 하지만 정윤옥은 쉽게 포기하지 않았다. 아이들을 위한 교육은 교실 안에서만 이뤄지는 게 아니라고 믿었고, 이후 수년간 전국을 돌며 강연하고, 칼럼을 쓰며 교육의 본질을 되짚었다. 파면된 교사는 외롭다. 복직의 기회는 요원하고, 주변은 조용히 거리를 둔다. 하지만 정윤옥은 그 외로움 속에서도 “나는 교사였다”라고 말할 수 있는 삶을 스스로 만들었다. 정년이라는 단어가 무색할 만큼, 그녀의 교육은 교실이 아니라 사회 전체를 향하고 있었다.
가족, 돌봄, 책임: 여성의 이름으로 살아간다는 것
정윤옥의 삶에서 빼놓을 수 없는 키워드는 ‘가족’이다. 특히 뇌병변장애를 가진 동생 ‘지호’와의 관계는 그녀 인생의 방향을 결정지은 사건이었다. 열 살 무렵, 부모는 경제적 사정으로 지호를 시설에 보내기로 했다. 그 결정은 어린 윤옥에게 ‘무력감’이라는 감정을 각인시켰고, 수십 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씻을 수 없는 상처로 남았다. 여성에게 부과된 가족 돌봄의 책임은 무형의 족쇄와 같다. 결혼을 하지 않았지만, 그녀는 언제나 ‘딸’, ‘누나’, ‘맏이’로서 가족 전체의 안정과 책임을 도맡아야 했다. 지호의 병원비, 부모님의 요양, 형제들의 갈등을 중재하는 일까지. 그녀의 삶에는 ‘나’를 위한 시간이 좀처럼 허락되지 않았다. 한편으로 그녀는 이런 현실에 순응하는 대신, 질문을 던졌다. “왜 이 모든 책임은 여성에게 주어지는가”, “왜 돌봄은 개인의 희생으로만 해결되어야 하는가” 그녀는 이러한 의문을 현실 속에서 부딪치며 해답을 찾고자 했다. 지호를 다시 만난 후, 그는 단순히 ‘도움이 필요한 존재’가 아니라, 인권을 가진 주체로 바라봐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후 정윤옥은 장애인의 자립과 권리 보장을 위한 소규모 활동에도 참여하게 된다. 그녀의 인생은 단순한 ‘희생의 서사’가 아니다. 그녀는 끊임없이 저항했고, 질문했고, 실천했다. 돌봄의 구조를 바꾸는 일은 쉽지 않았지만, 그녀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성찰과 실천을 이어갔다. 그것이 바로 ‘여성으로 산다’는 말의 무게였다.
지켜야 할 세계, 책방과 삶 사이에서
교사로서의 길이 막히고, 가족 돌봄의 무게가 버겁게 느껴질 즈음, 정윤옥은 스스로를 회복시키기 위한 공간을 만들기로 결심했다. 그 결과 탄생한 것이 바로 풀뿌리 책방이었다. 이 작은 공간은 단순히 책을 파는 곳이 아니었다. 동네 아이들이 와서 만화책을 읽고, 동네 어른들이 와서 이야기를 나누는 공동체의 쉼터이자 배움터였다. 책방에서는 자그마한 강연도 열렸고, 독서모임도 이어졌다. 지역의 청소년들은 여기서 첫 사회참여를 경험했고, 노년층은 책을 통해 세상과 다시 연결되는 느낌을 얻었다. 하지만 이러한 이상은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자본과 공간, 갈등과 피로가 그녀를 다시 떠나게 했다. 책방 문을 닫고 돌아오는 길, 정윤옥은 자신에게 말했다. “다시는 돌아가지 않겠다.” 이 말은 실패의 선언이 아니라, 더 이상 혼자서 모든 걸 짊어지지 않겠다는 결심이자 선언이었다. 그녀는 책방을 떠났지만, 책방에서 얻은 관계와 기억, 사유는 그녀 속에 깊이 남았다. 정윤옥은 언제나 스스로의 ‘세계’를 지키고자 했다. 그 세계는 가족이었고, 책방이었으며, 자신의 내면이었다. 많은 이들이 세상의 무게에 눌려 ‘지키는 일’을 포기할 때, 그녀는 끝까지 “지켜야 한다”라고 믿었다. 그 믿음이 그녀를 고립시켰지만, 동시에 그녀를 살아 있게 했다. 정윤옥은 거창한 이념이나 거대한 조직에 기대지 않았다. 그녀는 개인으로서, 여성으로서, 교사로서, 그리고 인간으로서 매 순간 자신의 세계를 지키려 했다. 그것은 교실이었고, 동생의 병상이었고, 서점의 테이블 위였다. 고단했지만 포기하지 않았고, 상처받았지만 물러서지 않았다. 정윤옥의 삶은 결국, 우리 모두에게 묻는다. “당신은 무엇을 지키고 있는가” 삶은 늘 선택의 연속이며, 그 선택이 쌓여 우리를 만든다. 정윤옥은 우리가 너무 쉽게 잊는 ‘존엄’과 ‘책임’이라는 단어를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그녀는 조용하지만 분명한 방식으로, 이 시대의 교사이자 시민, 여성으로 살아냈다. 그리고 이제, 그 이야기가 우리 삶을 지탱하는 또 하나의 근거가 된다.